▲ 정우영 서울대 외교학과 4년
  모두가 성난 사회이다. 최근 불거진 유통업계에 만연한 갑의 횡포에 대한 문제제기 이후 사회 전반에서 갑의 횡포에 분개하는 목소리들이 터져나온다. 최근 몇 년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해온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매번 대중들로부터 ‘더러운 한국사회’에 대한 분노의 폭발을 불러일으키지만, 매번 그걸로 끝이다. 아마도 이번 ‘을의 고발’ 역시 분노의 폭발 이후 이내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분노하는 목소리들은 이내 더러우면 성공해서 갑이 되라거나, 빨리 돈 벌어 이민가라는 식의 자조와 냉소의 목소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짓밟히고 무한경쟁에 지친 이들의 성난 목소리는 묻히겠지만 주기적인 분노의 폭발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성나고 지친 이들을 달래주어 분노를 잊고 감내하도록 종용하는 이른바 ‘힐링 산업’의 메시지도 현실의 갑을관계와 학교폭력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이렇듯 모두가 화나고 성난 속에서, 뜬금없지만 우리 헌법의 첫 조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헌법은 한 정치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한 문건으로서 해당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성원들의 합의가 담긴 문건이라 할 수 있다. 즉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은 대한민국이 민주국가이며 동시에 공화국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합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관적인 인상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와 그 수호에 대한 논의는 활발한 반면, 공화국의 이념적 기초가 되는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공화국은 어떤 의미일까. 과연 단지 왕이 없는 국가에게 상투적으로 붙는 이름표에 불과한 것일까. 오히려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에 지치고, 서로에게 화난 이들로 가득한 우리 사회가 되새겨야 할 가치를 담은 우리 공동체의 또 다른 기둥이 아닐까.

  이탈리아의 정치학자인 모리치오 비롤리의 저서 <공화주의>에 따르면, 공화국의 이상은 시민적 존엄과 덕성을 공유하는 평등한 시민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공화국의 시민들 사이에는 예속적 관계, 주종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민적 존엄에 기반한 유대감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비굴하거나 오만하지 않다. 다시 말해, 공화국의 이상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주종관계로 맺어지지 않으며 서로를 정체성을 공유한 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으로서 대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공화국의 이상이 이러할진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갑은 오만하고 을은 비굴하며, 성난 이들의 목소리는 더러우면 성공하라는 목소리에 파묻힌다. 과연 2013년의 대한민국은 갑과 을이 서로를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자 ‘내 편’으로 느낄 수 있는 공동체인가. 그렇지 않다. 인터넷 언론의 댓글 창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어서 돈 벌어 이민가자는 자조는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에 대한 애착을 잃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렇듯 구성원이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유대감을 상실한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잃고 만다.

  따라서 2013년의 대한민국은 공동체로서의 건전성과 유대감을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가 동의하여 헌법의 첫 조항에 새겨둔 공화주의의 이상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현실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승자와 패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갑과 을은 계약서 상에 규정된 관계 이전에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존재임을 이야기해야 한다. 학교폭력, 갑의 횡포에 대한 고발이 있을 때마다 터져나오는 분노가 다만 분노에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헌법에 새겨진 공화주의의 이념이 민주주의만큼이나 소중한 가치임을 되새기는 일이 필요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향점으로서의 공화주의를 이야기하는 일은 현실의 권력관계 속에서 잊고 있었던 사실, 즉 갑과 을은 주종관계가 아니며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는, 갑과 을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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