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세평]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탁류세평]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 고대신문
  • 승인 2021.02.2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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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옥 문화스포츠대 교수·국제스포츠학부

  신문 기자로 취재 현장에서 좌충우돌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스포츠 부서의 막내 기자가 자주 찾는 출입처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효창운동장이었다. 지금은 고교와 대학 대회가 주말리그 형태로 전국 각지에서 열린다. 당시엔 대다수 전국대회가 이곳에서 거의 매일 펼쳐졌다. 효창운동장 기자실은 출입문 높이가 유난히 낮았다. 오가며 머리를 한두 차례 찧어야 축구기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런데 기자실 위치가 묘했다. 선수 대기실 옆이었다. 하프타임마다 감독의 고성과 피부가 맞닿는 마찰음, 선수들의 신음소리를 여과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짐짓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현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요사이 TV 예능 프로그램의 대세인 허재, 서장훈, 현주엽 등을 앞세워 199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대학농구계도 폭력이 일상다반사였다. 풍채가 좋았던 한 대학 농구팀 감독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연습장에서 학부모나 기자들이 지켜보건말건 아무렇지도 않게 선수들을 손찌검했다. 당시 농구대잔치 경기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주로 열렸다. 그 대학팀 선수들은 지는 날이면 올림픽공원에서 강북에 있는 학교 숙소까지 뛰거나 걸어서 복귀했다. 지도자들의 지나친 체벌 때문에 숙소를 이탈해 운동을 포기하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폭력과 체벌을 스포츠계의 문화나 전통으로 여겼던 야만의 시절이었다.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의 이재영·다영 자매가 중학교 시절 상습적으로 괴롭혔다는 피해자의 폭로가 무서운 후폭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쌍둥이 자매는 뛰어난 배구 실력과 깜찍한 코트 매너로 인기를 끌었다. SNS 활동을 통해 많은 팬을 확보해 프로배구를 겨울철 최고 인기스포츠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학폭 미투로 두 선수는 소속팀으로부터 무기한 출전정지 징계를 받았으며, 한국배구연맹도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했다. 쌍둥이 자매에 이어 남자프로배구 OK금융그룹의 송명근과 심경섭도 학창 시절 동료 선수를 폭행했던 전력이 드러나자 스스로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최근엔 유명 프로축구 선수가 학폭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나오는 등 학폭 미투는 스포츠계 전반으로 번지는 형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스포츠계의 학교폭력 파문은 대부분 함께 운동했던 동료들의 폭로가 단초가 됐다. 하지만 지도자들의 폭력이나 인권침해는 공론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12년 전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박철우를 폭행해 대한배구협회로부터 징계를 받았던 남자프로배구 KB손해보험 이상열 감독 정도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언론과 인터뷰 과정에서 당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이 감독의 언급이 피해자인 박철우의 아픈 기억을 되살렸고, 결국 이 감독은 올 시즌 잔여 경기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아무래도 지도자들의 지명도가 스타급 선수들에 비해 낮기 때문인 듯하다. 스승의 폭력을 사랑의 매로 여전히 미화하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믿음도 원인으로 꼽힌다. 이상열 감독의 사례는 폭력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주홍글씨로 평생 남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학교폭력과 관련된 고발이 잇따라 터지면서 스포츠계, 특히 엘리트 스포츠 분야를 폭력의 온상으로 치부하는 자세는 경계해야 한다. 개인보다 팀이 우선하는 스포츠계의 가치관 때문에 선수들의 인권의식이 최근까지 경직됐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스포츠계의 폭력과 인권침해 정도가 다른 분야보다 심각하다는 선입견은 오해에 불과하다. 한국 형사정책연구원이 대학생 1902명을 설문 조사해 2019년에 발표한 대학 내 폭력 및 인권침해 실태와 개선방안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폭력이나 인권침해를 한차례 이상 경험했다고 응답한 학생이 가장 많았던 전공은 의·치대로 무려 72.5%에 이르렀다. 엘리트 스포츠 분야가 포함된 예체능계는 44.1%로 이공계(46.0%) 전공보다 폭력과 인권침해 경험자가 오히려 적었다. 어쨌든 폭력은 문명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 행동이다. 꽃으로도 때려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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