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사 기자로 생활하면 매주 기사를 쓰고 평가를 받는다. 신문이 발행된 월요일 오후면 기자들은 각 기사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써낸다. 처음에는 이 평가가 싫었다. 얼마나 애썼는지 옆에서 봤으면서도 비판하는 것이 야속했다. 동료가 쓴 평가서를 하나하나 읽어보며 상처를 받았다. ‘기사 작성 과정을 알 텐데 굳이 이렇게 말해야 할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고 독자들의 평가를 받아들이는 게 쉬운 것도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가로막았다.

  지난달 친구가 동생이 고등학생이 됐다며 공부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카페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기에 슬며시 웃어넘겼다. “공부야 본인이 하기에 달렸지.” 대답이 끝나자 곧바로 대화의 소재는 넘어갔다. 한 달 후 그 친구가 동생의 과외를 맡기고 싶다고 했다. 전반적인 공부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덧붙였다. 친구의 동생과는 이제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됐고, 성적과 공부법을 확인했다. 이후 친구는 되물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어떤 공부 방법이 필요할까?” 성적에 맞는 공부법을 추천해줬고, 더불어 앞으로의 수업계획도 설명했다. 지난달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너무나도 달랐다.

  관심의 차이였다. 아니면 프로의식의 차이였을까. 친구의 동생일 때에는 그의 공부법에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선생님이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기사에 대한 평가 또한 그랬다. 동료의 평가는 관심을 갖고 기사를 봤기에 가능했다. 단 말이든 쓴 말이든 관심을 두고 읽었기에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오히려 쓴 말은 관심을 가질수록 하기가 더 어렵다. 친구의 동생에게 정직하기 어려웠다. 최대한 에둘러서 말했고, 꺼내지 못한 말도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말하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동료의 평가를 보며 감사함을 갖는다. 그들의 진심 어린 애정과 관심이 느껴진다. 오늘도 생각한다. 좋은 말은 듣기에도 쓰지만, 하기에는 더 쓰다고.

 

김시현 기자 poem@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