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윤석열 대통령은 이른바 ‘쌍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여야 간 정치적 갈등 등의 우려가 나오고 있다.


쌍특검과 아전인수(我田引水) - 박상민(정경대 정외23)

  정치가 점점 야만적으로 변해 가는 듯하다. 2023년 1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주도로 이른바 ‘쌍특검’ 법안이 통과됐다. 문서가 정부로 이송되기도 전에 대통령실은 법률안 거부권 발동을 시사했고, 1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은 쌍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집권 3년 차에 4번째 거부권 시행으로 8개의 법안이 재의결 요구를 받게 됐다. 이를 두고 찬반 사이 의견이 분분하다.

  거부권 시행을 옹호하는 측에서 주장하는 쌍특검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4월 총선을 앞둔 더불어민주당이 총선 승리를 위해 의석수를 앞세워 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다수당의 독재를 보인다는 것이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의 입장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4개의 야당은 대통령의 반복적인 법률안 거부권이 국정 운영에 있어 입법 교착 상태에 머물게 하고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을까?

  사실, 우리는 이따금 도덕적 기준에 따라 행위의 결과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잠시 미루고 행위의 원인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두 거대 양당 모두 이익 추구라는 합리적 판단에 따른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행정부와 현 집권당의 이익을 고려했을 때 영부인의 구속을 막고 총선을 대비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 아닐까? 

  야당 또한 다르지 않다. 총선 시기가 다가왔을 때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와 영부인에 대한 의혹을 이용하여 여당의 의석 확보를 방지하고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정치권의 제1목적은 재선에 있다. 양당의 행태 모두 자기 이해 추구에 지나지 않는 행위이다. 한편 정치적 양극화의 시대에서 목소리를 내는 유권자는 주로 이념적·정서적으로 양극화된 유권자이고 이들은 지도층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보일 뿐이다. 이에 따라 거대 양당은 핵심 지지층만을 공략하는 정책과 발언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특정 개인 혹은 정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위는 현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늘 이와 같은 이유로 비롯돼왔다. 의회에서 합의제의 관행이 깨지고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남발, 편향된 미디어에 의한 쟁점 프레이밍 등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 상대 진영에 대해 합리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인지 능력과 협력의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사유화됐다 - 정윤석(정보대 컴퓨터17)

  대통령 개인의 가족 비리에 대한 특검이 대통령 본인에 의해 거부됐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거부권은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권력 견제를 위한 것으로, 헌법학자들은 그 정당성을 해당 법률의 △헌법 위반 △집행 불가 △국익에 반함 △정부에 대한 부당한 압력 △예산 및 재정상의 부담 △대통령의 정책과 배치됨으로 규정한다. 친인척의 비리 수사 특검에 대한 거부권의 행사는 그 명분은커녕 견제의 기능도 찾기 어렵다.

  현 여당은 특검 추천권이 야당에만 있으며, ‘언론 브리핑’ 조항이 있다는 점에서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미 검찰 조직 및 집권 세력으로부터 특검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이를 합헌으로 보장했다. 이미 유권해석이 존재하는 마당에, 여당은 ‘독창적’인 헌법 해석을 주장하고 ‘총선용 특검’이라고 ‘정파적’ 으름장까지 놓는다. 어디까지나 자당의 편을 들어줄 한 사람, 대통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치 체계의 작동이 대통령의 개인적 기준과 해석으로 취소될 수 있다면, 그 정치 체계는 더 이상 고유한 체계로서 기능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제6공화국의 입법 절차에는 300명의 국회의원에 이어 한 명의 대통령이 ‘1인 상원’으로 남아 있다. 차이가 있다면, 상원은 대등한 대표자들의 토론과 표결을 거쳐야 하지만, 대통령은 휘하 각료들과 토의를 거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대의 정치는 대통령의 자의에 의해 훼손된다. 정치 체계에 신뢰할 수 있는 원칙은 이제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정치 체계는 자기 좋을 대로 동문서답을 반복하는 관료 놀음으로 축소된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사유화됐다. 대의민주제는 대표자에 의한 인민 의사의 대의로써 정치를 실현하나, 거부권 정치는 이를 원자화된 개인으로 흩어버리고 두루뭉술하게 상징화된 대통령만을 남긴다. 견제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의의 전제와 열광적인 관중만이 남을 뿐이다. 윤 대통령은 이번 네 번째 거부권으로, 1년 반 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5년간 거부권과 동률을 이뤘다. 

  약 5개월에 한 번이라는 이 추세를 유지한다면 임기 말에는 거부권을 7번으로 가장 많이 행사한 노태우 대통령의 기록을 뛰어넘을 것이다. 이 글이 작성되는 지금도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특별법 거부권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헌법이 정한 권한이 권력이 되고 그 힘이 다시 자격이 되는 이 논리가, 개인적 카리스마를 능력 삼아 민주공화국을 우롱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야망과 겹쳐 보이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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