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연극평론가·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
김건표 연극평론가·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

 

  만년 배우로 살아오신 오현경 선생이 88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MZ세대에게는 낯선 노장의 배우일 수 있지만, 중장년층들에게는 드라마 <TV 손자병법>의 종합상사 자재과 만년 과장 이장수의 향수가 짙다. 꼬장꼬장한 캐릭터인데도 부하 직원을 알뜰히 챙기는 서민적인 역할로 인기를 끌었다. 고교 시절 연극반을 거쳐 연세대학교 극회로 시작한 배우 인생은 TV 드라마, 연극, 영화에서 수많은 극중 인물을 선생의 말투와 캐릭터로 창조했다. 드라마 <내 멋에 산다>의 바보 연기는 코미디언 심형래의 영구 캐릭터의 원조였고, 내시 특유의 억양과 리듬으로 인물을 창조해 낸 분이 선생이셨다. <햄릿>, <포기와 베스>, <세일즈맨의 죽음>, <아들을 위하여>, <휘가로의 결혼> 등 수백 편의 연극 무대에서는 비극의 주인공부터 소시민 역할까지 오현경 선생만이 표현할 수 있는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배우가 ‘나’에서 ‘너’라는 극중 인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사와 감정, 동작과 몸짓, 미세한 표정과 움직임, 감정에 반응해야 하는 본능적인 몸의 감각까지, 주어진 역할을 표현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이것들이 최소한의 재료다. 극중 인물로 체득돼 가는 과정에서 인물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시간에는 개인의 삶은 절제가 요구되기도 한다. 쌓여 가는 극중 인물의 영양분들이 배우의 언어와 몸의 감정으로 완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치열한 훈련이 필요하고 통증이 따른다. 그만큼 내 몸이 다른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노장 배우는 “구순을 넘겨서야 연기가 되는 것 같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흉내로 만들어진 가짜 연기는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진리다. 빙의(憑依)된 상태처럼 육신과 말투, 모든 행동이 진실한 감정의 상태로 전이돼 극중 인물로 변화된다.

 

드라마 TV 손자병법의 이장수 과장을 연기하는 故 오현경 배우의 모습.
드라마 <TV 손자병법>의 이장수 과장을 연기하는 故 오현경 배우의 모습.

 

  오현경 선생은 특히 ‘화술’을 강조하셨다. 발성과 대사의 리듬, 억양, 정확한 끊기와 말의 고저와 장단, 톤, 모음과 자음의 발음까지 한 음절의 대사 처리에도 그 리듬의 박자로 우리말 소리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선생이 우리말 사전을 들고 다니신 일화는 유명하다. 화술과 발성 기초 훈련이 끝나면 다음은 ‘연기하기’다. 화술 훈련이 부족한 배우는 언어 감정이 뭉개져 감각적 연기를 할 수 없다. 감정의 정확한 신호로 몸이 반응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짜 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훈련이 서툰 배우는 발성과 화술이 정확해도 소리로만 연기하게 되며 감동을 줄 수 없다. 배우 정동환은 추모사에서 “연극을 보신 뒤 대사가 하나도 안 들린다고 하셨을 때 절망적이었다”라고 고백하며 “그 말씀이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배우의 진실한 감정으로 ‘말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 무대에서도 배우의 연기가 소환되곤 한다. 정치인 연기는 대중을 인식한 이미지 연기이다. 배우가 외형만 그럴싸한 이미지 연기를 한다면 감동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배우의 연기는 극중 인물로 살아가기 위한 진실로 무장한 내면과 닿아 있다. 정치인의 연기든 배우의 연기든, 대중의 감동은 진심과 진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배우 인생을 살아온 오현경 선생이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연출이 지시한 대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정확한 화술로 인물의 마음을 담아낸 진실함이 흉내 낼 수 없는 인물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4월 10일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관객이 감동을 주는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듯, 유권자는 공약에 진심인 후보자를 선택할 것이다. 대한민국 미래의 감동은 여러분한테 달려 있다. 그 시작이 안암골 호랑이들이 돼 주길.

 

김건표 연극평론가·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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