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것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 삶의 모습은 언제나 뻔하면서도 항상 흥미롭다. 그래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인간 삶의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사랑 이야기들은 그들이 어떤 ‘방향성’을 갖는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그 방향성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쪽으로 삶이 진행하느냐, 아니면 이야기가 사랑을 만들어 가는 쪽으로 삶이 진행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은 후자에 해당하는 러브스토리다. 작가가 이런 구분을 의식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소설이든 희곡이든 영화든 사랑의 서사는 거의 이런 ‘잠재적 공식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전문가들은 이 작품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로 구분한다. 그러면서 어떤 이는 상투적 상업영화라고 슬쩍 폄하하기도 한다. 그야 어쨌든 간에 이 영화가 ‘상투적’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전문가들이 지나치는 것이기도 한데, 사랑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비극이 되지만, 이야기가 사랑을 만들어 가면 희극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대표적인 예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사랑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서사 구조가 강세였다. 셰익스피어는 자기 시대까지 있었던, 사랑이 이야기를 만들어간 수많은 ‘슬픈 사랑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를 희곡의 틀에 담아 비극적 러브스토리의 전형을 만들어낸 것뿐이다.

영화 역사의 사랑 이야기 분야에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품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그 제목만으로도 낭만의 70년대 학번들은 모두 기억할- 아더 힐러(Arthur Hiller) 감독의 1970년 작품 『러브스토리』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목젖을 무척이나 부어오르게 했던 비극으로 끝난다. 첫 만남에서 곧바로 사랑에 빠진 남녀가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처음 남녀가 티격태격하는 과정이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영화는 말하자면 ‘이야기 → 사랑’이 아니라, ‘사랑 → 이야기’로 전개된다.
반면 『미술관 옆 동물원』은 전형적인 ‘이야기 사랑’이다. 이야기가 사랑을 만들어 가는 서사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노을이 물들 듯 서서히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다. 사랑 그 이후는 줄거리와 관계없다.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남녀의 불같은 사랑이, 자신들의 의지로 사랑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의 의지’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은 그 다음이 어떻게 진행될지 인간의 의지로는 보장할 수 없으므로 비극적일 것이라는 입장을 가졌다.

하지만 자연의 절대(?) 원칙에서 좀 벗어나 본다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는 순간부터 티격태격하고 그 ‘재미난 싸움’을 꽤 지속하는 남녀는 사건의 발전을 위한 변증(dialectic)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의 절대적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문화적 상대성이 상호 자극을 주는 활력으로 작용해 사랑에 즐겁게 골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는 말이다. 절대적 사랑은 남녀 이야기를 비극적 종말로 끌고 가지만, 상대적 남녀 이야기는 사랑의 희극적 결론에 이르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극중 극이라는 장치를 쓰며 이중 구조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 역시 보통 사람들이 사랑을 만들어 가는 틀 속에 있다(오히려 이정향 감독은 영화 곳곳에 배치한 이분법적 트릭이 스토리 텔링에 매우 효율적이라는 점을 너무 의식했는지 모른다). 군복무 중인 철수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애인 다혜의 집을 찾아오지만, 그곳에는 세련된 다혜가 아니라 촌스런 비디오 촬영기사이자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춘희가 살고 있다. 다혜는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터, 실연하고 휴가동안 딱히 갈 곳도 없는 철수는 춘희와 우연의 동거를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춘희와 철수는 함께 극중 극의 스토리 텔러이자, 그들 자신의 스토리 메이커가 된다.

둘은 연애관에서, 성격, 취향,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미술관과 동물원처럼 영 딴 판이다. 처음에 서로 여자와 남자로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이질적인 사람 사이에서도 '옆'이라는 상황이 지속될 때는 어떤 이야기든 만들어간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 제목의 핵심어는 미술관도 동물원도 아닌 ‘옆’이다.

이제 가을이 완연하다. 봄이 사랑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이야기로 사랑을 만들어가라고 있는 계절인지 모른다. 봄처럼 자연의 열정이 겉잡을 수 없이 솟아나는 게 아니라, 으스스 소름 돋는 팔뚝의 살갗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움츠리고 싶어지는 계절 그래서 누군가 옆에 서로 비비듯 앉아 있고 싶은 계절이 가을이다.

춘희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철수를 집 밖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을씨년스럽게 비는 오고, 춘희는 그의 집 앞에 세워둔 차 안에 기거하듯 앉아 있는 철수에게 다가가 말한다. “너 내가 여자로 안 보인다고 했지. 됐어 그럼 올라가자. 아이, 춥다. 빨리!” 사랑을 향한 그들의 스토리는 이렇게 아스스 살갗을 비비고 싶은 날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을은 오스스한 계절이다. 센티멘털리즘의 촌스러움에 빠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용기가 있다면, 이 낭만의 가을에 이야기로 사랑을 만들어보지 않겠는가. 그러면 해피엔딩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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