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과 경찰은 일반 국민들이 느끼기에 국가공권력을 대표하는 기관들이다.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국가권력은 무엇보다 법적 강제력이고, 이는 국가형벌권의 행사를 담당하고 있는 검찰과 경찰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검찰과 경찰을 얼마나 친숙하게 생각하며 신뢰하는지는 그 시대의 민주주의 내지 법치주의의 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로서 이용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도 일제시대의 순사에 대한,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의 검찰과 경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많이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검찰과 경찰에 의해 발생된 사망사건들은 이러한 공권력에 대한 국민의 개선된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그 중에서 경찰이 시민에 대해 총을 쏘아 사망하게 한 사건은 개인의 실수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이 피의자를 심문하면서 고문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고의적 행위이다.

이처럼 고문수사가 행해졌다는 사실은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의 고문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일제시대 이래로 계속되어 온 잘못된 수사관행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공권력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검찰에서도 이례적으로 적극적이고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대검이 수사에 착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검사의 책임을 확인하였고, 결국 사상 초유로 현직검사가 구속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사표를 쓴 것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 사건에서 의외인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이다. 각 신문이나 방송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수사절차상의 ‘구타행위’ 또는 ‘가혹행위’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고문’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해 가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대통령도 ‘고문’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왜 언론이 이를 외면하고자 하는가? 언론조차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검찰의 눈치를 보아서 적당히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인가?

이 사건의 심각성은 그것이 우발적으로 발생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즉 이 사건은 검찰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수사실적을 높이기 위해 자백을 강요하고, 고문을 가하는 행위가 얼마나 커다란 문제인지를 법률가인 검사들이 모를 리가 없다. 과거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최고법인 헌법에 고문의 금지를 명시했으니 말이다.

이제 국민들은 더 많은 의혹의 시선을 검찰에 대해, 아니 모든 국가기관들에 대해 보내게 될 것이다. 과연 검찰에서 행해진 고문수사가 더 있는 것은 아닐까? 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는데, 왜 검찰에서는 유죄를 전제하고 고문부터 하는가? 설사 유죄라 하더라도, 그리고 피의자가 전과자나 조직폭력배라 하더라도 고문의 금지, 무죄추정의 원칙은 통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검찰은 인권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아니던가. 그동안 검찰은 이른바 준사법기관으로서 엄정한 법집행을 늘 주장해왔고, 또한 경찰수사권의 독립을 반대하는 논거로서 검찰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놓고 보았을 때, 검찰이 경찰이나 국정원(과거의 중앙정보부, 안기부)과 과연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검찰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검찰이 운이 나빠서 이런 사건이 발생되었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확인할 부분은 확인하고,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개선할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 특히 검찰의 수사관행에 대한 획기적 개선은 더 이상 미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국가공권력의 행사가 그러하지만, 특히 국가형벌권을 주도하는 검찰이 그 권한을 오·남용하게 될 때의 파급효과는 다른 국가기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많은 국민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고 이 문제의 해결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검찰에게 남은 것은 변화를 통한 신뢰의 회복뿐, 다른 대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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