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텔레비전 사극으로 만들어진 고려 건국 이야기가 인기를 끌더니, 연극계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올해 들어 두 편의 고려 이야기가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인 『고려의 아침』은, 재래음악과 전통춤과 민속연희로 무장하여 스펙터클과 음악적 측면에서 제법 인상적인 기억을 남긴 작품이다. 한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악가무(樂歌舞)〉가 있는 연극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드라마는 없었다. 문제적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인 『수릉』은 이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부각시킨 작품이다.

『수릉』은 세 가지 측면에서 독특한 인상과 문제 의식을 제공한다. 먼저, 이 작품이 꼼꼼한 역사의 재구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조선에 비하면, 고려에 대한 기록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사료의 부실은 고려 이야기를 연극으로 혹은 다른 연행 장르로 만드는 것에 제약을 가져왔다. 자료적 풍성함과 해석적 다양함을 쉽게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릉』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작가는 『고려사』의 사료를 충실하게 해부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장면을 축조했다. 공민왕의 이야기가 비록 세간의 주목을 받지만, 그의 일대기를 역사적 진실 위에서 세우려는 시도가 극히 드물다고 할 때(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신봉승이 만든 것과 홍창수가 만든 것이 유일하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주목될 만하다. 여기서 『수릉』의 일차적 가치가 빛난다.

두 번째는, 역사가 현재의 전사(前史)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점이다. E.H. 카는 역사란 과거를 조명해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역사를 핵심 인자로 삼는 역사극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소임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 현재적 의미와 미래적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동시에 역사극은 드라마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인간적 진실에 대한 관찰도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주인공은 역사적 특수성에 침윤된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 지니는 갈등과 문제의식을 담보한 존재여야 한다. 『수릉』이 그려내는 현실은, 난세의 형국이다. 외국 세력에 빌붙는 무리, 사리사욕과 일가의 안위를 앞세우는 권문세족,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으나 욕망의 덫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거짓 위정자, 총애를 믿고 교만해지는 신진 세력으로 일대 만원이다. 사견을 보태면, 우리가 기억하는 근현대사의 어느 지점이나 작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 틈바구니에서 공민왕은 개혁을 시도한다. 그는 역사의 정당성을 믿고 영명한 지혜를 간직한 인물이지만, 현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차츰 패퇴해 간다. 주변 인물들과의 내면적 불화도 한 몫 단단히 한다. 그는 높은 이상을 가졌으되, 현실을 읽지 못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불행한 치자들과 역시 같아진다. 즉 쇠망하는 고려는 불행했던 근현대사 속의 또 다른 한국이며, 동시대적 현실이며, 어쩌면 이어질 미래의 초상이다. 이것은 흥미로운 발견이고, 섬뜩한 충격이다.
 

무대 설계, 수릉 내부와 의미 구현에 적합
권력 문제 성찰에 유현한 문학적 상징 배치


마지막은, 공민왕의 일대기를 통해 권력의 문제를 성찰하되, 그 중심에 유현한 문학적 상징을 배치한 점이다. 『수릉』은 정치적 개혁에 관한 이야기만도 아니고, 말도 많은 요승 신돈에 관한 이야기만도 아니며, 노국공주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만도 아니다. 공민왕이 겪었던 총체적 갈등을 형상화하고 그 내면 풍경을 옮겨오는 것에 최종 목적을 둔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목적은 ‘수릉’이라는 공간으로 좁혀진다. 무대는 수릉의 내부와 의미를 구현하기에 적합하도록 설계된다. 그래서 수릉은 공민왕의 삶과 갈등과 패퇴를 보여주는 장소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불만도 파생된다. 수릉은 보다 굳건한 연극적 중심이 되어야 한다. 바깥 세상과 병존하는 지금의 수릉 구조로는 이러한 의미적 결절점이 제대로 형성되기 어렵다. 수릉의 공간 속에서 현실과 갈등이 공존하며 길항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수릉 속에 당시 현실이 이끌려오도록 재배치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수릉이 갖는 연극적 상징의 폭과 깊이가 더 웅숭깊어지고, 플롯에 대한 일부의 오해도 불식될 것으로 생각된다.

난세는 여러 형국이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욕망의 흘러넘침’이다. 수릉은 온갖 인물 군상의 욕망이 흘러 넘치는 난세 가운데에 위치한 유일한 고요이다. 따라서 수릉이 미학적 핵심에 놓이기 위해서는 난세에 대비되는, 권력적 소란함이 사라지는 공간이 되어야 할 줄로 안다. 반권력의 장소, 즉 ‘권력의 무덤’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안에서 공민왕의 욕망마저 자제되고 반성될 수 있다면 더욱 의미 있는 연극 공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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