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크리에이터’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앞으로의 정보사회는 디지로그(Digilog)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명예교수는 0과 1, Yes와 No로만 이뤄진 삭막한 디지털에 아날로그적인 인간 감수성을 도입해 따뜻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인 특유의 ‘엉거주춤 문화’, 즉 애매모호한 태도야말로 디지로그 시대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단언했다. 이유를 묻자 “한국인의 중용정신을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중앙일보 고문실에서 만난 그는 기자와 만나기 앞서 2개 방송사와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했지만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 지금과 달리 40년 전의 이 교수께서는 한국인의 ‘엉거주춤 문화’에 대해 상당히 답답해했는데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시대가 변했다. 그때는 산업사회의 문명적 번영만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가 목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농업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부분, 즉 애매모호한 태도는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마이너스 요소였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짝 잃은 앵무새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짝인 줄 알고 자신의 분신을 쪼아리다 죽었다는 이야기마냥 내 자신의 가슴을 파먹듯이 자기반성을 하면서 죽어라 서구사회를 따라갔다. 그런데 막상 지금 와서 보니 서구화가 오히려 우리의 ‘엉거주춤 문화’ 뒤에 와 있더라.

△ 지금은 시대상이 어떻길래 서구사회의 흐름이 우리 문화 뒤에 와 있는가
-계란요리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까지는 삶은 계란요리와 같이 흰자와 노른자가 개체화된 형태의 문화가 대세였다. 서구 문화는 삶은 계란 요리와 같아 시대상과 맞아 떨어졌지만 우리는 흰자와 노른자가 엉거주춤하게 섞여진 스크램블드 에그와 같은 문화라 산업사회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에 와 보니 계란 프라이와 같이 흰자는 서로 붙어있으면서 노른자는 각각 떨어진 것, 즉 핵심은 떨어져 있으면서도 주변은 붙어있는 문화 정신이 대세다. 이것이 퓨전 문화이고 프랙탈 구조나, 프릭션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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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런 시대상으로부터 디지로그 개념을 이끌어냈는가
-그렇다. 사이버는 본래 희랍어로 배를 조정하는 키를 말한다. 배의 키 조정을 통해 방향을 틀어가며 중간점을 찾아 나아간다. 그러므로 사이버야말로 흑백논리로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0과 1, 예스나 노로 확연히 갈라지는 기존의 디지털 문화는 인터넷 상의 커뮤니케이션에 싸늘함과 대립, 폭력을 불러왔다. 그러므로 스크램블드 에그의 특성이 혼합된 형태인 계란 프라이 형태를 인터넷으로 끌고 오자는 것이다. 디지털에 아날로그의 감상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서 디지로그가 온다. 디지털 또는 아날로그로만 쏠린 현상에 우리의 중용 정신을 적용해야한다.

△ 특별한 학문적 계기는 없는 것인가
-내가 디지로그라는 말을 만들긴 했지만 기존에 그런 학문은 많았다. 나만의 독창적인 이론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아날로그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 중용정신을 적용하자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중용을 통해 오늘날의 IT현상을 이해하자는 뜻이다. 괴테는 은행잎에 동양사상을 비유했다. 은행잎은 두 개이면서도 하나인데 이는 동양학의 중용을 뜻한다. 즉 0과 1로 만들어진 디지털이라는 최신 화두에 음양사상을 적용해 중도를 취하자는 것이다. 손으로 쓴 핸드라이팅을 일일이 스캔하면 인력낭비다. 그러나 컴퓨터 화면에 쓰면 바로 입력되는 아노트 펜은 그 문제를 깔끔히 해결한다. 디지로그펜이다. 아노트펜은 키보드 사용을 못하는 사람도 컴퓨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 그 외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달라
-스티브 잡스의 아이팟이 대표적인 예다. 아이튠스와 아이팟을 연계해 기존의 mp3업계와 음반사 간에 말썽이 많았던 저작권 문제를 해결했다. ‘비빔밥 문화’와 같은 한국적 통합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도 요즘은 하이브리드 카가 대세다. 하이브리드 카는 저지대에서 달릴 땐 배터리를 쓰고, 언덕 위에서는 기름으로 달린다. 또한 요즘 나오는 핸드폰은 글자가 필기체다. 아날로그적 느낌을 살린, 디지로그 제품이다. 손으로 컴퓨터 화면에 글을 쓰면 바로 입력되는 아노트펜 역시 디지로그펜이다. 아노트펜은 키보드 사용을 못하는 사람도 컴퓨터를 할 수 있게 해 줬다.

이어령 씨는 디지털 사회가 앞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아노트 펜의 예와 같이 디지털 사회에 아날로그 감각을 얼마나 잘 끌어들이느냐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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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로그 개념 현실화를 위해 ‘몸으로 돌아가라’란 말을 했는데
-인간의 몸은 디지털과 같은 기계의 질서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인간의 몸은 3가지 종류의 정보를 인식한다. 기계정보와 미디어 정보, 그리고 생명정보다. 점심 먹을 때를 예로 들어보자. 점심때 배가 출출한 것을 느끼는 것은 생명정보로부터 나온다. 시계를 보고 점심때인 것을 아는 것은 기계정보에서 나오고 끼니 때 먹어야 한다는 인식은 사회문화정보에서 나온다. 밥 한 끼 먹는 데도 세 가지 정보가 합쳐져야 가능하다. 하지만 기계는 이런 과정이 불가능하다. 기계가 사람을 따라와야 디지로그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인지과학의 발달이 필요할 것 같다
-정확히 지적했다. 키보드를 보자. 우리말에는 ‘ㅆ’자가 많이 들어가는데 ‘ㅆ’자를 쓰려면 가장 안 쓰는 손가락인 새끼손가락으로 Shift키를 눌러야 한다. 새끼손가락을 혹사시키니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러나 인지과학과 같이 생체공학적 학문의 연구결과를 적용한다면 이런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 디지털 기계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어넣으려면 어떤 상상력이 가미돼야 하는가
-컴퓨터를 보자. 컴퓨터에는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메뉴, 까페, 스팸은 음식에서 나온 단어이며, 자바 언어도 자바 커피에서 나왔고 애플컴퓨터 이미지도 반쯤 파먹은 사과다. 결국 우리들이 하고 있는 컴퓨터의 세계도 숫자와는 달리 창조적이고 상상적이다. 블링크(blink)이론과 같이 미팅 때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2초만에 꼭 ‘쟤다!’하고 찍는 게 인터넷에서도 가능한가. 앞으로 정보사회에선 efficiency가 아니라 감동해서 끌리고, 끌어안고 싶은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 한 포탈사이트를 통해 ‘GNR(게놈 · 나노 · 로봇) 기술이 20년 내에 상용화 되는 것에 대한 생각과, 이 기술을 만약 활용한다면 어떻게 활용해야 발전적이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몇 년 전 와이어드(Weird)라는 IT 전문 잡지에서 제시한 논쟁 주제를 한번 옮겨봤다. 당시 와이어드가 위의 논쟁거리를 제시했을 때, 전 세계는 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빌 조이라는 사람은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며 전자 공학하는 사람에게 정보를 주면 안된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이것을 사이언스픽션 정도로 생각한다.

△ 그런데 선택한 답변들의 내용은 지금 말한 것과 상당히 다른데
-답변들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 일치하는 답변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 중에서 제일 잘 썼다 싶은 것 2개를 골랐을 뿐이다(웃음).

그는 젊은이들이 학점이나 정치같이 눈 앞에 닥친 환경만을 무작정 쫓아가는 것을 질타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내 인생의 무대가 될 환경에 대해 주체적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살아있는 로봇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 인문학은 IT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인문학의 기본은 언어이다. 딱딱 떨어지는 맛이 있는 자연과학의 숫자와 달리 언어는 애매하고 어렴풋한 것이다. 정답이 없다. 또한 유일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하나로 융합 한다. 인문학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언청이나 모두 유일하다는 가치에서는 같다고 본다. 인간적이다. 그런데 우리의 세계는 결국 인간의 생명과 영혼과 관련돼 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을 해도 인문학 지식이 있어야 매력있는 학문이 된다.

△ 디지로그는 독도 분쟁 등 아시아가 당면한 외교 문제에도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나
-현재 유럽과 남미는 지역문화를 기반으로 통일된 민족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EU가 한 사례다. 그렇다고 우리도 민족주의로 흘러선 안 된다. 주몽? 어림도 없다. 보편성에 호소해 그들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글로벌하면서 로컬해야지, 로컬만 해선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 당신 말에 따르면 아시아 내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 같은데
-EU나 미국을 경계하려면 아시아 국가가 네트워크 국가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아시아가 가위바위보처럼 해야지 금은동 순위를 매기면 안 된다. 실제로 무역에서도 한중일 각국이 흑자와 적자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규모가 커진다. 주먹이나 보만 있으면 안된다. 가위가 있으니까 세 국가의 균형이 잡힌다. 이것이 디지로그에 말하는 밸런스다. 사이버 밸런스다. 아시아 3국이 다 잘되려면 반일, 반중으로 가면 안 된다. 패권주의로 흐를 뿐이다. 원효대사의 원융회통사상을 현대적 외교, 정치 기술에 적용해야 한다.

△ 기업체를 대상으로 강연을 많이 하는데 앞으로 기업인들은 어떤 의식구조를 지녀야 한다고 보나 -이제는 기업인도 지식인이 안되면 살아나갈 수 없다. 이걸 내가 왜 만들지, 어떻게 만들지등의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만들어지는 창조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또한 언제나 문제의식을 지녀야한다. 문제가 없는 기업은 발전할 수 없다. 카오스 경영을 통해 위기에 그때그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글의 CEO는 카오스 이론을 경영실무에 적용해 구글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해놓은 밥을 먹을 생각만 한다. 밥을 끓일 생각을 해야지 않겠나.


△ 글로벌화를 외치는 대학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교육이란 미래사회에 대한 투자인데 똑같은 글로벌만 외쳐선 지금과 다른 미래를 만들어낼 수 없다. 대학에 시장논리를 적용시키면 어떻게 미래의 꿈과 이상을 만들어내나. 변전소는 될 수 있어도 발전소는 될 수 없다. 대학이 아카데미즘을 표방해야 비판이 생성돼 그들이 틀렸을 때 제어할 수 있다. 세상은 퍼즐과 수수께끼로 이뤄져 있다. 미래는 지금의 지식으로는 해답이 나올 수 없는 수수께끼다. 돈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퍼즐이 아니다. 그것에 대응하는 대학이 되어야 한다.

이어령 씨는 틀에 박힌 사고는 향후 미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사고의 비약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기자에게 물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봄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냐고. 그러면서 대학은 모범답안을 쓰는 학생이 아닌, 엉터리 답안을 쓸 수 있는 학생을 기르는 장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 논문을 표절하는 교수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표절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 전에 교수가 얼마나 논문이 쓰기 싫었으면 표절을 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논문을 표절하는 교수는 부도덕한 교수이기 전에 고통스러운 교수이다. 글쓰기는 적은 보수로 하는 가장 고된 일이지만 백만장자도 모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재미를 마다하고 업적 때문에 표절하는 교수는 불행한 사람이다. 학문을 업적 중심으로 평가하는 제도가 이런 교수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감동적인 구절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진리가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데. 그런 재미를 잃어버린 교수는 이미 교수가 아니다. 교수가 보수 받는 것 이외에 일에선 재미를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 최근 사회적으로 ‘자살’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젊은이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강조하신 것으로 안다.
-자살은 정신질환으로 현대사회의 스트레스에서 오는 병이다. 옳고 그른 걸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젊었을 땐 센티멘탈해서 누구나 한번씩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나. 나도 그랬는데(웃음) 다만 내가 안 된다는 것은 모방 자살을 말한다. 쟤도 했는데? 하는 집단의식에서 유발된 자살은 바보짓이다. 인터넷을 통한 모방자살의 감염 경로가 넓어져서 문제다. 옆에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반면 사회적 자살은 그 사람 도덕의식에 호소해선 해결이 안 된다. 이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 젊은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
-진보냐 보수냐 그 놀음 하지 말고 자기 정신으로 세상을 보고 방황하라. 이것이 젊은이의 특권이다. 방황하고 고통 받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젊은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버리는 것이다. 어떤 못난 인간도 조각상보다 낫다. 인간은 360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잃지 마라. 살아있는 조각상이 되고 싶은가.

인터뷰가 끝날 즈음, 이 명예교수는 본지 독자들에게 자신의 글과 말은 사색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며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했다. “마치 사공이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듯이 자신의 사상에 집착하지는 마. 새로운 강을 만나면 새 뗏목을 만들어야 하니까.”

디지로그란?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를 결합시킨 신조어이다. 디지털 요소에 아날로그적요소를 결합시켜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하자는 문화적 코드를 말한다. 지금까지 종종 디지로그란 말을 단편적인 기술용어로 사용해 온 적이 있으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어령 씨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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