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카메라와 워커>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김밥 하나’는 김밥이라는 음식이 없는 외국엔 ‘준비한 김에 싼 밥 한 입’으로 표현된다. <바람과 강>의 ‘좋은 집터를 본 그날 용꿈을 꾼 기제이’라는 구절은 ‘용’을 불길한 존재로 여기는 프랑스인들에게는 매우 이상한 표현이다. 프랑스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고 지적하며 완전한 번역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다중적 의미를 지닌 언어표현이 많은 경우는 번역이 더 어렵다. 예를 들어 ‘미역국을 먹다’, ‘욕봤다’, 뜨거운 음식을 먹고 ‘시원하다’고 하는 부분을 직역하면 이 말들의 2차적 의미를 모르는 독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를 의역하면 원작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들어온다.

물론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언어에서는 연한초록과 빨간색이 한 단어고 노르스름한 초록색과 잿빛갈색이 한 단어다. 푸른색과 검은색, 약간 검은색도 하나의 단어로 표현된다. 이를 두고 언어학자들이 색감보다 명도나 채도에 더 관심이 있는 그리스인들의 문화에 대해 언급한 것과 달리 번역학자들은 색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기준을 가진 그리스인들을 집단색맹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언어학자 무냉은 이처럼 동일한 현실을 서로 다르게 분절하는 연구와, 번역상황이 번역 언어의 문화에 존재하지 않는 점을 번역의 대표적 어려움이라고 말했다.

표기법에 있어서도 번역의 문제점이 여실히 노출된다.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된 서정주 시인의 다른 두 권의 시집에는 글쓴이의 이름 철자가 다르게 씌여 있다. 한 권은 So Jong-Ju로 다른 한 권은 Sue, Jong-Jou로. 그러나 프랑스 독자들은 이를 서로 다른 시인으로 보고 있다. ‘이(李)’를 Lee, Li, Yi, Rhee 등으로 표기해도 모두 이 씨로 이해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프랑스는 각각 다른 성씨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 언어만의 특징을 번역하는데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사람은 스페인 번역학자 카란자(carranza)다. 그는 한국적 요소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 긴 설명보다 그림이나 사진을 첨가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또 우리나라 작품을 외국 문화에 맞게 번역하는 외국인 번역자 또한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에드워드 사이덴 스티커(Edward Seidensticker)는 <설국> 등의 여러 일본작품을 미국에 실정에 맞게 명번역한 점을 높게 평가받아 노벨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영국출신의 외국인 안선재(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한국작품 30여편을 영어로 번역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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