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31일부터 보건복지부는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법’을 시행을 시작했다. 24시간 자살예방 긴급전화를 설치하고 공공기관에 정신건강 선별도구를 보급하는 것이 이 법의 골자다. 작년에는 하루에 마흔 명꼴로 자살자가 나왔으니 더 이상 정부도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임은 틀림없다. 이미 자살하겠다는 사람을 진정시키고 잠재적인 자살자를 찾아내는 작업만으로 진짜 예방될 수 있을까.

이제 막 교복을 입는 중학생에서 꼬부라진 허리의 할머니까지 그 나이대가 다양한 만큼 또래의 따돌림, 가난 등 자살을 감행하는 이들의 사연도 여럿이다. 하지만 그들의 슬픔이 서서히 차오르다 어느 순간 임계치에 달한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곁에서 나를 응원해주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외로워 혼자 끝까지 남았던 ‘나’마저도 내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나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기는 세상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에 그들은 마지막 실수를 저지른다.

학창 시절 좋은 성적으로 부모님과 선생님께 인정받았고 그것을 ‘나의 가치’로 받아들였다. 앞서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본받을 일이었고 평범함은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고 순식간에 나는 ‘무가치’한 못난이가 됐다. 잘 나가는 남들과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날 비교하고 물리적, 정신적으로 자해했다. 다시 남들의 기대를 받고 싶어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일에 뛰어들고 결과에 허탈해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가끔씩 제풀에 지쳐 무능한 나에게 실망하는 것도 지겨웠다.

프란츠 카프카는 “모든 문제는 우리가 방에 가만히 앉아 자신과 단둘이 마주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했다. 왜 우리는 자신이 아닌 ‘남’의 말과 눈길에 좌절하고 주위 이목에 스스로를 못살게 굴게 됐을까. 사실 남들이 나를 선망하든 말든 그것은 글자 그대로 ‘남’의 것인데 말이다.

잠시 고시 합격한 엄마 친구 아들과 연인 친구의 돈 잘 버는 애인을 잊고 ‘나’와 나를 이야기해보자. 남들이 뭐라 해도 내 삶을 향한 기대와 진지한 고민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