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숙사에 아나키스트가 산다. 군용 전투화를 신고 무릎 보호대를 덧댄 채 바이크를 탄다. 출근할 때는 오른손에 헬멧을 들고 “Lovely Day!” 혹은 “See ya!”라고 외친다. 대마초 합법화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길 좋아하고, 밤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한다. 음. 써놓고 보니 아나키스트라기보단 그냥 이상한 형 같다.

  그런데 이 형이 얼마 전부터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꾸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골자는 기숙사에서 수건만 걸치고 돌아다니는 건 문제 될 게 없다는 것. 발단은 이렇다. 얼마 전 형이 샤워를 하고 수건 한 장을 두른 채 나오다 같이 사는 사람에게 한 소리를 들었나 보다. “그 수건만 걸치고 돌아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형은 자신의 나체를 부끄러이 여기는 문화가 잘못됐다고 응수했다. 유럽에는 이미 누드 비치가 있고, 원주민은 옷을 입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고. 우리가 부끄럽다고 여기는 것의 근원은 무엇이며, 왜 스스로를 답습되고 있는 나쁜 문화에 가둔 채 부자연스러움을 택하게 됐냐고, 형은 말했다. 그렇게 형은 나체를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얼마 전 한 달에 한 번씩 기숙사 거주자들이 모이는 정기 반상회에서 그때의 이슈가 아젠다로 올라왔다고 들었다.

  형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우스웠다. 음, 당연히 안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개개인의 다양성과 자유는 존중하지만, 그래도 기숙사는 단체 생활인데. 자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까지 허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황현산 선생은 맥락을 따지는 일이 곧 그 사람과 삶을 존중한다는 일이라고 했다. 맥락 뒤에는 또 다른 맥락이 있고, 그곳에 삶의 깊이가 있기에. 그 일에 시간과 정성을 바치는 일보다 행정 규정을 폭력적으로 들이미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 나는 이해하지만”, “물론 그럴 수야 있겠지만”. 그 변명을 뒤따르는 것은 단체였다. 개인보다 공동체, 주관보다는 규범. 대의에 가까운 미명은 나를 숨긴 채 나의 목소리를 올곧이 전하곤 했다. 그리곤 누군가에게 쉽게 말했겠지. “그 사람, 원래 좀 특이하잖아” 한때 SNS에서 유행하던 글이 있었다.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 이유는, 내가 그 사람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맥락을 이해하는 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마이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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