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 놓고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 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 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상하게 전두환도 노태우도 아닌 ‘5공 실세’ 허화평의 회고였다. 성공적인 대회 결과와는 별개로, 올림픽 유치 원동력에는 비민주적으로 집권한 5공의 여론 전환과 체제 경쟁의 승리라는 프로파간다적 목적이 존재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당장의 기회를 잡는 게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꽤 적극적으로 이뤄진 88 올림픽을 유치한 정권의 생각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빈 답안지와 원고지, 자기소개서 등 채워나가야 하는 여백들은 항상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강의가 지루할 때 빈 연습장 한쪽에 재미로 그린 만화 주인공이나, 빈 편지지에 좋아하던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써 내려갈 때는 오히려 빈칸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소개서나 과제, 포트폴리오 같은 것들은 합격과 탈락, 정답과 오답,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지양해야 하는 표현과 지향해야 하는 표현을 고심해 단어와 접속사, 조사를 조합하다 보면 한 글자를 쓰는 것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미혼이라는 내 상태도 그렇다.
요즘 정치권이며 언론이며 연일 ‘출산율’ 문제로 시끄럽다. 합계출산율이 1을 하회하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인구는 2020년 역사적 고점을 찍고 2021년부터 하락 전환됐다. 인구통계의 장기적 추세를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감안할 때, 단기간 내에 출산율이 유의미하게 반등하지 않는다면 급격한 인구절벽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정부는 역사상 마지막으로 70만명 이상이 태어난 1990년대 초반생에게 희망을 걸고 다양한 정책들을 내걸고 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1990년대 초반 ‘가임기 여성’이다. 얼마 전 결혼을
친구로부터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가 선망하던 회사였고 그 친구가 얼마나 치열하게 취업 준비를 했는지 알기에 아깝다고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자기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원래 그 업무가 글 쓰는 업무임은 친구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듣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 이유가 다인가?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던 중, 예전에 본 이키가이 다이어그램이 떠올렸다. 일본어로 이키는 ‘삶’을 뜻하고, 가이는 ‘가치’를 뜻한다. 의역하면 ‘사는 보람’ 정도로 해
좋았던 것 같진 않다. 고향을 떠나 도착한 3월의 학교는 아직 추웠다. 처음 만난 선배, 동기들에게선 반가움보단 눈치를 먼저 읽었다. 지금은 없어진 과방 건물에서 우두커니 앉아 뭘 해야 할지 전전긍긍했다. 신입생의 첫사랑을 다룬 영화가 그해 극장가를 흔들었다. 당시 가장 잘나가던 아이돌 배우가 첫사랑 역할로 나왔다. 영화 속 예쁜 아이돌까진 아니더라도 나 역시 뭔가가 있겠지. 현실은 냉정했다. 좋아하던 친구에게 마음을 거절당했을 때 눈물이 났던 일은 아직도 혼자만의 술안주로 남아있다. 2024년 신입생을 독자로 상정하고 글을 썼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을 봤다.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고, 문외한인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 그간 가족을 중심으로 한 영화들을 찍었기에 이 영화 역시 가족이 소재가 아닐까 하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가족으로 시작하는 것인가 싶더니 이내 다른 내용이 나왔다. 이 영화는 초등학생 아이가 주인공이고, 같은 사건을 아이의 엄마 시선에서, 아이의 담임선생님 시선에서, 아이 시선에서 그려낸다. 엄마는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엄마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고, 담임선생님도 누구보다 아이들을 생각하
유자청을 사 왔다. 패딩을 꺼내 입을 때가 되면 버릇처럼 유자청을 사 온다. 고등학교 때부터 매년 그랬다. 덕분에 우리 집 겨울철 냉장고에는 늘 유자청이 있었다. 매년 샀고, 매년 다 먹지 못했다. 냉장고 구석에 뚜껑만 따 놓은 유자청을 볼 때마다 엄마는 볼멘소리를 했다. 유자차를 좋아하지만 자주 마시진 않는다. 뜨거운 음료를 잘 못 마신다. 뜨거운 커피를 시킬 땐 얼음을 1~2개 띄우거나 뚜껑을 열고 20분 정도 김을 식혀 마시는 버릇이 있다. 마셨을 때 ‘아 조금 있으면 미지근해지겠다’ 싶은 정도의 온도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과정과 결과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열심히’보다 ‘잘’이 중요하다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듣기도 하지만, 많은 선생님은 과정의 가치를 낮게 보지 않는다. 학생의 발표나 과제에서 진지함과 성실함이 엿보일 때면 무척 고맙고 대견하다. 특히 성실함은 좋은 결과에 대한 기대와 연결되어 학생을 향한 기쁨이나 안타까움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좀처럼 결석하거나 결근하지 않는 사람 혹은 할 일을 빼먹지 않는 사람을 흔히 성실하다고 평한다. 그래서 ‘성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관련된 말로 생각하기
평소 아버지보다 산을 더 빨리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튼튼한 신체를 타고 나셨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를 빼곤 병원에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발걸음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 왼쪽 고관절 뼈와 다리뼈가 만나는 부위가 닳아져 있었다. 곧바로 인공고관절 치환수술을 받으셨다. 퇴원 후 평소처럼 아버지는 앞장을 서시고 어머니는 뒤를 따라 걸으셨다. 나는 “다행이다”고 안심했다. 몇 개월 뒤 아버지가 무거운 기름통을 옮기며 무리를 하시다가 결국 척추협착증이 심해졌다. 이어 골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초등학생들의 수학 문제를 풀어준다. 내가 6월 말쯤부터 시작한 일이다. 당시 나는 지쳐있었다. 다른 사람의 추천서까지 받아 가며 남들이 좋다고 하는 회사를 여러 곳 지원했지만,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 처음엔 남들이 어디로 간다더라, 어디 취업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저 부러웠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혹시 내가 별 쓸모없는 사람은 아닐까?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엄청난 운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쓸모 있고 싶어서” 초등수학 문제를 풀어주는 오픈카톡방을
우리 기숙사에 아나키스트가 산다. 군용 전투화를 신고 무릎 보호대를 덧댄 채 바이크를 탄다. 출근할 때는 오른손에 헬멧을 들고 “Lovely Day!” 혹은 “See ya!”라고 외친다. 대마초 합법화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길 좋아하고, 밤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한다. 음. 써놓고 보니 아나키스트라기보단 그냥 이상한 형 같다. 그런데 이 형이 얼마 전부터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꾸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골자는 기숙사에서 수건만 걸치고 돌아다니는 건 문제 될 게 없다는 것. 발단은 이렇다. 얼마 전 형이 샤워를 하고 수건 한 장을
대학원 석사 과정 첫 학기의 일이다. 어느 날 강의 자료 복사를 부탁하시는 원로 교수님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이메일에서 요청 사항보다 마지막 인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X군, 번거로운 일 잘 부탁하네. 그럼 이만. 총총.” ‘총총’이라니? 어느새 나의 머릿속에는 총총걸음으로 (기왕이면 뒷걸음질로) 바삐 퇴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그래서 곧바로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총총4(悤悤) (부사) 편지글에서, 끝맺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총총’은 내
사범대생인 한 후배가 “진로 고민을 할 때 ‘네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 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비가 내리는 밤, 노래 들으면서 버스를 오래오래 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흔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으면 좋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삼을 수만 있어도 인생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현재 글쓰기가 본업은 아니다. 다른 삶을 살고 싶어 직업을 바꿨다. 첫 직장을 그만둘 때 정말 두려웠다. 퇴직하고 얼마 뒤 나에게 글을
글을 쓰기가 참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글을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쓰기는 싫어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때 글쓰기 선생님께서는 “정 싫으면 한 문장만 적어보자~”고 나를 여러 차례 회유하시기도 했다. 반항이라도 하듯 “재밌었다”는 네 글자만 적었다.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며 그거면 충분하다고, 다음에는 더 써보자고 말씀하셨다.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학보사를 다니면서부터인 것 같다. 주간 교수님께서는 글을 잘 쓰려면 “S+V”를 노트북 화면 밑에 붙여놓고 글을 쓰라고 하셨다. 글쓰기의 방법은 전혀 몰랐지만, 왠지 그
무서웠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거든. 몽자가 나를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건. 누나를 따라 미 국에 갔던 몽자가 5년 만에 돌아왔다. 한국 들어오는 길에 함께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문을 열었다. 착착착. 귀에 익숙한 소리다. 발바닥보다 살짝 긴 검고 굵은 발 톱이 바닥에 부딪혀 나는 그 소리가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못 알아보더라. 아주 잠깐은. 몽자가 천천 히 꼬리를 흔들며 내 냄새를 이곳저곳 맡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내려다본 몽자는 여전히 윤기가 흘렀지만, 어딘가 모르게 균
2000년대 들어 ‘공감’이라는 말은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러미 리프킨의 표현을 빌리자면 21세기는 바야흐로 공감의 시대이다. 공감이란 사전적으로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을 뜻한다. 이러한 정의를 따른다면 ‘공감’은 감정적 일치, 의견에 대한 동의, 주장에 대한 동조 등 타인과의 ‘일치’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 된다. 그런데 공감이 단순히 타인과의 일치를 뜻하는 것이라면, 타인과의 일치를 이렇게 강조할 필요가 있을지, 교육의 중요한 화두로 삼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가령
외계인들이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고양이로 변신했다는 설이 있다. 외계인들은 과학기술의 잘못된 사용으로 자신들의 행성이 오염되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우주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푸른 별 ‘지구’를 발견했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와 행동, 심리 등을 연구한 결과, ‘고양이로 변신해 지구인들의 마음을 빼앗은 뒤 지구를 정복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외계인은 자신들의 지능과 정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고양이로 변신하는 일이 식은 죽 먹기였다. 약 5000년 전쯤 그들의 침입이 본격화됐다. 당시 인류는 농경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호퍼와 호크니를 구분하지 못하는 애인과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를 봤다. 아마도 휘트니미술관에서 보낸 작품은 비슷할 텐데, 20대의 감수성과 30대의 감수성의 차이인지, 이상하게도 12년 전 덕수궁미술관에서 했던 ‘이것이 미국미술이다: 휘트니미술관’ 전시 때 받았던 감흥보다는 못했다. 그래도 건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호퍼 개인전이라 호퍼의 아내인 조세핀 호퍼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조세핀은 호퍼를 열심히 뒷바라지했다. 그 증거로 조세핀이 전시 이력, 작품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 오랜만에 꺼내 쓴 마스크는 꽤나 답답했다. 지난 3년간 마스크가 내 피부처럼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한두 달 ‘노마스크’ 외출을 했다고, 다시 쓴 마스크가 그새 이물감을 줬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내 경우 코로나19 이전 마스크 없던 생활로의 복귀는 꽤 탄력적으로 이뤄진 셈이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기간 ‘확찐’ 살은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재택근무, 원격근무의 ‘단맛’을 알아버린 내 몸은 월요병에 더 취약해졌다. 배달음식 의존도도 좀처럼 낮아지지 않고 있다. 3년여 간의 코로
'냉전'(冷箭)은 숨어서 쏘는 화살이란 뜻으로 고대신문 동인이 씁니다. 지난해 여름 영국은 어딜 가나 온통 유니언 잭으로 가득 둘러싸여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 행사의 여운이 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여왕은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으로 휴가를 떠났지만, 버킹엄 궁전 앞에는 매일 사람들이 몰렸고, 빅토리아역에서 버킹엄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버킹엄 궁전 개방 행사가 이전보다 더 특별해졌다는 안내문이 부착됐었다. 많은 지하철역 곳곳에 붙어 있던 즉위 축하 메시지, 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