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봤다.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고, 문외한인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 그간 가족을 중심으로 한 영화들을 찍었기에 이 영화 역시 가족이 소재가 아닐까 하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가족으로 시작하는 것인가 싶더니 이내 다른 내용이 나왔다. 이 영화는 초등학생 아이가 주인공이고, 같은 사건을 아이의 엄마 시선에서, 아이의 담임선생님 시선에서, 아이 시선에서 그려낸다. 엄마는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엄마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고, 담임선생님도 누구보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지도하려는 선생님이다. 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엄마, 이상적인 선생님이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그 과정에서 아이는 상처를 받게 된다.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으나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는 세상의 중심이 나에게 있었고, 남을 신경 쓰기보다 내가 원하는 행동을 했었다. 내 말과 행동으로 남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는 부차적인 고려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관계 속에 있으며 생각보다 남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바탕에는 살면서 겪은 크고 작은 실패들이 있었다. 학업, 연애, 취업 등에서 겪었던 여러 실패가 쓸데없이 비대했던 나의 자의식을 깎아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관계에서 미숙한 순간이 많다. 여전히 영화 괴물에서처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했으나,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니, 그건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와 남의 경계에서 나에게 엄격하고, 남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하려고 할 때 그나마 다른 사람들과 나는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괴물>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 어려움을 타개했을까? 평소보다 조금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한 발짝 더 나아가 남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극복했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는 말을 배운 적이 있다. 공자가 말한 ‘70세의 경지’로,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말이다. 정말로 70세쯤 되면 나의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것일까? 지금의 배움과 고민으로는 아직 택도 없어 보인다.

 

<탕비실쌀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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