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톨스토이는 물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고. 그는 그 답을‘사랑’에서 찾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은 톨스토이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게 만든다.

당신은 사랑만으로 살 수 있는가? 무엇으로 사느냐는 말에 밥이나 돈을 얘기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답이 아닐까.
 
서커스의 곡예사는 관중들을 위해 줄타기를 하지만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조는 살기 위해 전화선에 매달리는 줄타기를 감행했다. 안전망도 없는 줄에 매달려 외친 것은‘부당해고 철회 계약직 쟁취’라는 한 마디로 그들의 절규였다. 그 후 비정규직 노동자의 항변은 500여 일을 계속됐으나 뚜렷한 보상도 없이 마무리되었고 투쟁기간 동안 7000명의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삶을 살았다. 이들에게 세상을 ‘사랑’만으로 산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어느 자리에서든 작은 불안감을 지니고 사는데 적당한 불안감은 삶의 긴장감을 유지시키고 능력계발에 효과적이다. 오래 계속되는 평안은 오히려 나태와 태만을 낳기 쉽고 전반적인 경쟁력을 낮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제성장을 빌미 삼은 구조조정은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적으로 만들었고, 아침에 눈뜰 때면 밤새 내 책상이 안녕한지 걱정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비정규직은 ‘한 술’ 더 떠 퇴직금 ‘한 푼’없는 집단해고를 당했다. 더 이상 불안감은 삶의 활력소대신 독소로 뿌리내려지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굶어 죽기 때문에 시위 중에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와는 정반대에 서있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이 아니라 나라와 싸우기 위한다는 그들.

새로운 한해가 밝아왔고 16대 대통령이 결정됐다. 평소 노동자를 위한다는 그에게 비정규직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겠다던 그에게 한 표를 던진 노동자들은‘사랑’만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 당선자가‘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사회를 만들 것인지 역대 대통령을 따라‘가진 자의 가진 자에 의한 가진 자를 위한’사회를 계속 이어갈지. 짧지 않은 5년이란 세월동안 국민에 의해 냉정하게 기록되고 심판될 것이다.

안자영 제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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