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학교 행사가 열릴 때면 그 곳에 달려가야 했고, 수업과 겹치는 일정이 잡히면 수업을 포기해야 했다. 결강계가 나온다고는 하지만 학업에 대한 부담감은 언제나 날 뒤따라 다녔다. 목요일, 금요일 컴퓨터 앞에 앉아 아침 해를 보며 잠들었다. 여기에 익숙해진 내 몸은 평상시에도 밤 열두시를 낮 열두시인 것 같이 인식했고 작동했다.
개강을 하루 앞둔 지금, 앞으로 2시간 이내에 수습일기를 써 내야한다. 아… 사실 첫 번째 차례라서 ‘어떻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럼 고대신문을 들어오게 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고대신문을 왜 들어왔냐는 질문을 10번 이상 들은 것 같다. 면접 때도, 친구들에게도, 동기들에게도.사실 나의 꿈은 기자
‘박수 칠 때 떠나라’ 라는 멋진 말처럼 박수를 받으며 떠나보고 싶었다, 취재부를. 학생의 역할과 기자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학업을 게을리 하기엔 다가오는 미래의 압박이 너무 컸고 취재를 게을리 하기엔 매주 월요일마다 심판대에 오르는 내 기사들이 부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사회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질은 관찰과 이론.
문체에 대한 잔상..매일 기사만 쓰다가 일기 형식의 글을 쓰려니 너무 어색하다. 분명 딱딱한 글이 아님에도 나도 모르게 리드를 잡게 되고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빼버린다. 한번 글 쓰고 나서 스스로 빽을 보는 습관도 생겼다. 예전의 뒤죽박죽이던 글에 비해서 조금은 짜임새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신문사를 들어오기 전에는 글을 써도 문학적인 글만 썼다. 쓸데
이정훈오빠와 위대용오빠는 반가워서인지 둘이 심야데이트를 즐기러 나갔다. 신문사 안에 있는 라꾸라꾸와 쇼파베드에는 죽어가는 전민지와 정민교가 있고 졸려서 슬픈 김경민이는 치과를 가기 전보다 더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내 누워있던 정민교가 자리를 양보하고 클렌징을 한다며 화장실로 갔다. 김수정은 뭐라도 먹어야겠다며 새벽2시에 분홍색트레이닝차림으로 밖에 나
고대신문을 뷰 파인더에 담아보다 지난 해 3월, 난 평소 읽지도 않던 고대신문을 집어 들고 기숙사로 왔다. 그날 밤. 룸메이트와 고대신문을 깔고 치킨을 먹다가 수습기자 모집 광고를 보았다. 사진기자로 활동하는 고대신문사의 한 동인의 사진들을 보고 일반 취재부로 지원했던 지원서를 전부 지우고 사진부에 지원했다. 전에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었지만 그 사진들에
=수습기자였던 정기자의 일기지금은 삼일절 새벽. 하루만 지나면 개강이다. 난 이제 정기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수습기자에서 정기자가 됐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수습일기를 써도 될까'라고 고민도 했었다. 수습기자만 쓰는 '수습일기'라는 형식상의 제한을 잊고 '수습기자였던 정기자의 일기'를 통해 힘겹고 지루했던 겨울방학을 잊고 싶다. 1.
1.지난 달 창간기념호에 실릴 축사를 받아야 했다. 아는 분께 추천을 받아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난 한 교수님께 축사를 부탁드렸지만 ‘미안하지만 요즘은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란 이유로 거절당했다. 조교 분께 전해들은 말이었음에도 뭔가 중후하면서도 익살스런 분위기가 확 와 닿았다. 시간을 ‘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
내 이름은 하난데, 부르긴 여러 가지다. 고대신문 수습기자, 안암총학 담당기자, 재개발 담당기자, 학생처 담당기자···. 날 부르는 여러 방법이다.
교양관 6층은 사람을 멍하게 만든다. 오늘은 토요일 아침이다. ‘수습일기 써야지!’라고 생각했던 날이 월요일이었음을 생각하면 매우 느린 시작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생각을 안했던 것은 아니다. 미리 써야지 미리 써야지 하면서 한글2007을 켰다가 껐다가 하기를 계속 반복했다. 하지만 ‘수습일기’라는 제목을 쓰
나는 기자로서 ‘아직’(아직까진 ‘아직’이다) 빵점이다.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뻔뻔함 △용기 △부지런함 △책임감 △외모 조건을 만족해야 하지만 난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취재원을 만나고 연락하고 부탁하고 취재하는 것은 기자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나는 취재원에게
한창 수능 공부에 지쳐있던 고등학교 시절, 기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날카로운 시각으로 사안을 객관적으로 꿰뚫어보고, 똑 부러지는 질문으로 취재원을 당황하게 만드는 카리스마! 사회 시간에 배운 ‘언론은 제 4의 권력이다’란 말이 하루의 절반을 독서실에 앉아서 지루하게 보내던 내 가슴을 쿵쿵 울려댔다.그래서 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망설임
나는 07학번이다. 사실 3학년에게 새로 동아리에 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어려운 전공 공부에 토익이니 토플이니 하는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인턴, 해외봉사, 교환학생 등 할게 어찌나 많은지. 더구나 소위 ‘빡센 동아리’라는 고대신문에 지원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 내가 고대신문에 들어온 건 진짜 경험을 하
군에 있을 때 남성 잡지들을 보면서 에디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드라마에서도 잡지 에디터를 다루고 인지도도 높아졌지만 그때는 에디터가 무슨 직업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 였다. 그렇게 학교에 복학하고 따분한 학교생활을 하다가 고대신문 기자모집 포스터를 보고 “이거다!” 라고 생각이 들어 그날 바로 지원서를 작성했다.입사
지난 7월부터 고대신문사 수습기자가 되었으니 고작 두 달 남짓한 기자 생활이다.기자로 보낸 시간이 긴 것도 아니요, 만난 취재원도 많은 수가 아닌데 그새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수습기자일기로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참 어색하다. 왠지 ‘김 기자는 “~~”며 “~”라고 말했다&rs
2학년 2학기, 9월이 끝나가는 때였다. 몇 달 후면 3학년이 된다는 생각에 방학 이후 정신적으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 때였다. 뭔가 하나라도 해야만 했다. 동아리에 들 결심을 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한 경제관련 동아리였다. ‘이중전공이 경제학과니 뭔가 관련된 것을 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서류를 내고 면접을 봤다. 면접
‘학번무관’이라는 네 글자에 이끌려 고대신문사에 발을 들인지도 벌써 6개월에 접어들었다. 막연하게 언론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반응이 그러하듯 나 역시 식품공학을 전공하던 평범한 학생이었기에 기자로 활동할 기회가 오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터였다.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운 좋게도 ‘고대
학교를 다니면서 인맥도 넓히고 경험도 쌓을 겸,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학보사를 생각하게 됐다. 어렸을 때 가끔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직 수습기자를 모집하는 포스터가 붙지 않았을 때, 아무리 기다려도 모집 광고를 하지 않기에 홍보관 2층 고
고대신문사에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나의 생각, 습성(?!) 그리고 성격까지도. 지금까지 순탄하게 살아온 나는 세상사에 별 관심도 없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 내가 ‘세상을 향해 촉수를 뻗고 매 순간 살아가야 하는’ 기자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현실에 가끔 놀라곤 한다. 지금은 수습기자이지만 지난 학기엔 수습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