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생각하지 않는 인간’ 아이히만을 말한다. 평범한 가장에, 주위 사람들에겐 친절했고, 동료들에게 평도 좋았던 아이히만은 나치 당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아이히만은 유태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서게 되지만, 그는 반론한다. “저는 제 일에 충실했을 뿐입니다&rdqu
음, 최근의 감정 상태나, 근황 같은 건 글쎄. 튀고 싶어서 빼 버리는 건 아니다. ‘소감’을 쓰려고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가 먼저 떠올라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버렸다. 그래서 그걸 말해야겠다.분명 나의 말로 내가 쓴 글이지만 실은 다른 이들의 말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지금 털어놓는다. 짜깁기는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내게
안녕, 안녕, 안녕. 당신을 보내고 나는 작게 속삭여본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가는 이와 남는 이의 인사말이 다른 나라는 그렇게 흔치 않다. 신호등 너머 무수히 닮은 얼굴들 사이로 흩어지는 당신을 보며 결심한다. 당신이 내 밖으로 떠도는 동안 보았던 세상의 결을 한 모금씩 꿈속에서 들이키겠다고. 잘 남아있겠다고. 태생이 벙어리이기 때문에 활자를
수상 소식을 듣고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짜릿한 전율과 그보다 앞서 가슴에 떨어진 무거운 돌덩이 하나. 어릴 때부터 문학에 관한 관심이 많았지만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대학 입학 이후부터였다. 작은 서점에서는 시집을 진열조차 하지 않고 있을 정도로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서, 시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고민
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의 하루하루는 때때로 행복하고, 대체로 별 느낌 없으며 가끔 불유쾌하거나 막막하다. 일과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그날의 일들을 반추한다. 별 일 없이 지나간 하루가 있지만 먹먹한 앙금이 남는 하루가 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하루에서 기인했다. 로맨스라기엔 다소 우울하고, 설렘이 마냥 행복으로 이어지지
고대신문 창간기념 현상문예의 시 부문에 투고된 작품은 총 180편이었다. 응모 대상이 전국의 대학생임을 감안하면 많은 수라고 하긴 어려우나 예년에 비하면 늘어난 숫자였다. 삶과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를 형상화 하려는 시적 노력도 조금은 더 치열해 보였다. 경박한 대중문화의 범람 속에서도 지적인 언어의 꽃을 피워내려는 젊은 대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이 믿음직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 최준영 웅크리고 있던 거리가 척추를 펴고 일어서는 시간 포르노 테잎처럼 깔린 타일바닥을 걷는다 가로등에 기대어 택시를 부른다 고무냄새 나는 좌석에 앉는다 어깨를 미끄러뜨린다 머리를 떨군다 눈을 감는다 도서관에서 펼친 어느 화가의 화집 속 암석바다를 떠올린다 거대한 바다짐승의 식도를 타고 미끄러지는 꿈을 꾼다 짐승의 뱃속에서 깜빡이는
오랜 만에 대학생들이 쓴 소설을 여러 편 읽었다. 스마트폰 세대들의 소설이란 어떤 것일까, 제대로 된 문장들을 만날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뜻밖에 반듯한 문장으로 된 흥미로운 작품들이 꽤 있었다. 세상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결말에 개연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젊은 감각으로 세상을 만나는 치기와 아픔이 눈여겨 볼만 했다. [소년시대],
나는 우리의 관계가 구체적인 언어로 정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입으로 내어 말하지 않은 건 내가 너무 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도를 넘어선 신중함은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되었고, 나는 도무지 너를 읽을 수 없었다. 네 볼은 햇빛에 비춘 눈꺼풀과 같이 가느다란 실핏줄들이 피부 표면 가까이 엉겨있었다. 보
흔히들 고대생은 ‘안암골 호랑이’로 불려진다. 개교할 때부터 안암에 터를 잡고 발전해온 본교. 고려대를 생각할 때 바로 ‘안암’이란 지명이 떠오르듯 고대와 안암동, 더 나아가 고대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와 고려대학교는 서로 필연적인 동반자일 수밖에 없다. 상부상조하며 발전해 나가는 고려대와 지역사회의 모습을 조명해
1. 대학과 지역의 관계 맺기대학 교육이 어디에서 처음 시작하였느냐는 질문은 대학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에서 출발할 것이다. 많은 근대적 의미의 학문들이 서구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뒤, 전세계로 이식된 것처럼 여러 학문들을 함께 교육하는 ‘근대적 대학’은 유럽에서 12세기경에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의 대학
고대신문은 매주 수 많은 사람을 만난다. 교수, 교직원, 학생등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중에서도 학내외에 큰 이슈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대신문이 창간기념을 맞아 과거 고대신문에 보도돼 이슈가 됐던 학우 네명(조미덥(정경대 경제00), 서범진(문과대 철학02), 이일재(정경대 경제08), (간호대 간호05)
현직에 있는 기자들 중에는 대학신문 출신 기자가 많다. 언론을 향한 관심이 직업으로 이어진 경우다. 동일한 언론 활동이지만 풋풋한 학생 기자와 치열한 직업 기자의 세계는 멀어 보인다. 학생기자를 경험한 현직 언론인들은 과연 대학신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고대신문은 본지 편집국장 출신의 동아일보 채널A 기자 김기용(국어국문학과 96학번) 씨, 편집국장 출
최근 대학신문과 방송국을 포함한 대학언론은 사상 유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대학 구성원들의 이용이 감소하고 있고 인터넷과 SNS 등에 밀리는 경향이 나타나며, 이에 따라 대학 당국의 우선적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본고에서는 대학신문을 중심으로 국내 대학언론이 대학과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나 정리하고, 그 위기의 주요인으로 회자되
국내 대부분의 대학이 대학신문을 발행한다. 대학신문은 대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학생과 함께 해왔다. 학내구성원들에게 때로는 일상의 소소한 오락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시대의 촛불이 되기도 했다. 눈에 익었기에 무심코 지나치는 대학신문. 이들의 역사를 훑어봤다. 대학매체의 탄생대학신문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너에게 가서 내가 빛났다 -고대신문 창간 65주년에 부쳐 강연호(시인, 국문 81학번)너에게 가서 내가 빛났다한 시절의 어둠 속에서 나는 홀로였다 아무데도 눈 둘 곳 없어 어리둥절한 불우였다 언제나 멀리서 흐린 배경처럼 나는 그저 가만히 네 뒤에 숨어 침묵하고 싶었으나이윽고 너와 나는 나란히 섰다너의 눈짓이 나를 불렀는지 기
고대신문 창간 6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65주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나 글로 형용하기 힘들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 동안 고대신문이 고대 건학 정신을 바로 세우는데 일조한 그 공로는 65년이라는 긴 세월이 잘 말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고대신문은 타 대학 신문사들이 모범으로 배우고 있는 신문사로 알고 있습니다
고대신문의 창간 65주년을 축하합니다.SNS를 비롯한 첨단 네트웤 도구들이 오늘의 대학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자 정보 습득의 창구로 활용되고 있지만 대학신문으로서의 고대신문이 가진 위상과 영향력은 굳건합니다. 이는 고려대학교는 물론 한국 대학의 역사와 더불어 묵묵히 걸어온 고대신문의 발자취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활자에 청춘을 묻
1975년 3월 한 달 신입생 기분을 맛보기가 바쁘게 유신 반대 데모가 격렬해졌다. 대학 신입생이었지만 나는 신문기자가 될 팔자였는지 유신체제가 민주주의를 말살한 독재정치라는 확고한 인식체계를 갖고 있었다. 겁이 나서 선두에 서지는 않았지만 데모대의 뒷줄에서 “유신 철폐” 구호를 함께 목청껏 외쳤다. 그러다가 경찰 병력이 학교 안으로